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 (문단 편집) === [[언론]]에 대한 [[반성]]: 외신과 대한민국 언론의 차이 === [youtube(WZTajiZeCzc)] [[동양방송|TBC]] 동양라디오 1980년 5월 22일자 저녁 7시 뉴스 프로그램 '뉴스 기상도' 녹음 [youtube(j6JRZx6n8UE)] [[동양방송|TBC]] 동양라디오 1980년 5월 23일자, 5월 24일자 저녁 6시 뉴스 프로그램 녹음 [youtube(utfdTTh3khU)] 1980년 5월 27일('''광주 민중항쟁이 진압된 바로 그 당일이다!''') 밤 9시에 방영된 [[KBS]] [[KBS 뉴스 9|9시 뉴스]] 전체 방영분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시기 국내 언론은 오랜 기간의 독재정권으로 인해 사실상 대부분이 어용 언론사가 된지 오래였다. 정부에서 제작한 어용 방송인 [[대한뉴스]]는 당연히 독재 정권의 의도대로 제작했으며, 당시 제작한 대한뉴스의 영상을 보면 5.18을 전형적인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왜곡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itJ1U-wLE|'안정만이 살길']], [[https://www.youtube.com/watch?v=h0w99hDtG6A|'활기 되찾은 광주']] 첫 번째는 광주 항쟁을 전형적인 '불순 분자들이 조장한 폭동'으로 날조한 영상이고, 두 번째는 그 '폭동'이 끝난 후 광주의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한 영상이다. 일부 언론사들이 가끔씩 정부에 반하는 기사를 싣긴 했지만, 당시 독재정권은 오랜 역사와 노하우(?)를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은 신독재정권에 의한 [[언론 통제|언론계정화조치]]가 한창 이루어지던 시기였기도 했고, 이에따라 이 해에만 해도 수백명의 언론인들이 해고되기도 하였다. 그나마 인적 네트워크에 기반하는 지하 언론을 통해 관련 정보가 운동권 내에서는 간헐적으로 돌긴 했지만 [[인터넷]]도 없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것들이 일반 대중에게 전파되는 일은 없었다. 특히 이를 기사화하여 일반대중에게 전파해야 할 책임을 가진 국내 일반 언론사들은 신독재정권에 의해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었고 이를 기사화할 만한 양심있는 언론인들 대부분이 언론사들로부터 해고되거나 좌천되는 중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제보를 기사화할 동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건 당시, [[북부독일방송]] 도쿄 지국 소속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서울에서 한 [[김사복|택시운전사]]와 함께 동행해 광주로 잠입해 현장을 취재했다. 현재 80년 당시 남아 있는 컬러 영상 대부분이 힌츠페터가 촬영한 영상이다. 힌츠페터는 계엄군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5월 19일 광주에 잠입했고, 영상을 촬영한 후 필름을 '''과자통[* 당시 조선호텔에서 팔던 수입 과자를 담는 통이 필름 크기과 비슷했다.]에 숨겨''' [[독일]] 본사로 보냈다. 이 영상이 북부독일방송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Tagesschau|타게스샤우]]를 통해 방송되면서 세계에 광주의 실상이 알려지게 됐다. 힌츠페터는 5월 22일 2차 잠입 후 보강 취재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독일 본사에 보냈으며, 이 다큐멘터리는 80년대 [[독일]]에서 유학하던 [[천주교]] [[신부(성직자)|신부]]들이 녹화해서 국내에 들여와 당시 광주의 참상을 고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힌츠페터 기자는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다.[* 당시에 [[한국 천주교]]의 비밀 정보망을 이용하여 외신 기자들의 사진을 광주에서 해외로 옮겨갔다는 관련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TV방식이 다른데 어떻게 녹화하냐면 ___멀티시스템 VCR___이나 ___컬러 시스템 컨버터___로 VCR끼리 연결해 녹화를 하면 된다. 쉽게말해 [[PAL]]방식을 [[NTSC]]방식으로 변환한 것이라 보면 되겠다. 한편으론 이 영상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1993년까지 [[멀티시스템]] 제품에 대한 제재가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후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에 나선 [[위르겐 힌츠페터]]는 대한민국의 언론상인 송건호 언론상의 2회 수상자가 되었다.현재까지 유일한 외국인 수상자이다. 이후 이 기자와 그를 광주까지 데려다 준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내용으로 [[송강호]], [[토마스 크레치만]] 주연의 영화 [[택시운전사]]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때 당시 촬영된 힌츠페터의 영상은 다른 영화인 [[1987(영화)|1987]]에서 다시 한번 보여진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도 대사 한 줄로 짤막하게 언급되는데 힌츠페터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youtube(rryRy_UANiQ)] 당시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뒤, [[KBS광주방송총국]] 산하 비아송신소를 장악하고 시민군에게 무기 반납 및 투항을 요구하는 선무방송과, 5월 27일 도청 진압작전 당시 시민군들에게 경고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때 민주화 운동권에서 [[훌라송]]으로 쓰이던 [[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을 '''행진곡(!)'''으로 쓰는 등 고도의 심리전을 벌였다.] 시민들을 대변해야 할 언론이 계엄군에 의해 시민을 폭도와 간첩으로 몰고, 거짓된 작전 결과를 발표하는 도구로 쓰였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